[뷰티풀게임=서형욱] 지난 주 스페인에서는 작은 이변이 일어났다. 올 시즌 스페인 리그 우승을 노리는 레알 마드리드가 세비야에게 덜미를 잡힌 것이다. 세비야 역시 강호이니 이변이란 말이 어색할 수도 있지만, 3강 구도로 마무리되는 올 시즌 라 리가의 상황을 감안하면 레알의 패배는 분명 눈에 띄는 결과다.

지난 여름 퍼디낸드 헌정 경기에서 맨유를 상대로 공격 중인 카를로스 바카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레알을 잡은 세비야의 선봉에 나선 선수는 콜롬비아 출신의 공격수 카를로스 바카다. 바카는 27일 세비야 홈에서 열린 라 리가 경기에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1골을 넣는데 그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혼자 2골(동점골, 역전골)을 몰아치며 2-1 역전승의 이변을 연출했다. 하지만 진짜 이변은 따로 있다. 지금 여기에 당도하기까지 바카가 걸어온 삶이야말로, 일반적인 예상을 뛰어넘은 이변이자 희망이 가져온 기적의 증거다.

1986년생인 바카는 한국 나이로 올해 스물 아홉 살이다. 유럽 최정상 리그인 라 리가에서 뛰는 선수라면 프로 선수 경력이 10년은 족히 되고도 남을 나이다. 하지만 바카는 7년 전만해도 프로 축구 선수가 아니었다. 2007년, 스물 두 살이던 바카는 고향인 캐러비안의 어촌 푸에르토 콜롬비아의 시장에서 생선을 팔면서 인근 도시를 오가는 시외버스에 탑승해 차표를 팔거나 검표하는 일을 병행하는 고된 삶을 살고 있었다. 축구를 좋아했고 재능도 충분하다고 믿었지만, 워낙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축구에만 전념할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버스 차장은 운전 기사를 도와 버스에 탄 승객들에게 표를 검표하는 직업이다. 자동화가 이뤄진 한국에선 이젠 사라진 직업이지만 콜롬비아에선 여전히 버스마다 차장들이 표를 팔며 운전기사를 보조한다. 당연하지만, 큰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생선을 팔고 버스 티켓을 검표하던 바쁜 틈새로, 자기보다 겨우 한 살 더 많은 호날두가 EPL 챔피언이 되는 장면을 TV로 겨우 지켜봤을 남미 어느 시골의 20대 청년 하나. 7년 뒤, 그는 세비야 유니폼을 입고 레알 마드리드전에 선발로 나서 바로 그 호날두와 맞붙어 동점골과 역전골을 터뜨렸다. 바카의 드라마틱한 인생역전을 고스란히 드러낸, 지난 3월 27일 경기의 스코어보드.

생계를 위한 부업을 하며 지역팀에서 뛰던 바카의 축구 경력은 2007년 미네르벤에 입단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베네주엘라 2부 리그에 속한 미네르벤은 21경기에서 14골을 터뜨린 바카의 활약을 앞세워 리그 2위에 오른다. 이후 콜롬비아 리그로 복귀한 바카는 계속된 활약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무렵 원소속팀 주니오르와 처음 정식으로 프로 계약을 맺게 된 바카는 훗날 "첫 월급을 받자마자 온 가족을 불러 모아 잔치를 열었다"며 감회에 젖었다. 한편, 계속된 활약을 이어간 바카는 2009년 소속팀 아틀레티코 주니오르의 주전 공격수로 자리 잡으며 컵 대회 득점왕에 등극한다. 그리고 2010년과 2011년에는 2년 연속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자신은 2년 연속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다. 2010년부터는 대표팀에도 발탁되어 A매치 데뷔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리고 콜롬비아 리그에서의 활약은 유럽 클럽들의 관심을 끌었고 여러 팀들과 교섭을 끝낸 바카는 2012년 1월 겨울 이적 시장에 벨기에 리그의 명문팀 클럽 브뤼헤로 이적하게 된다. 이적료는 150만 유로, 바카의 나이는 스물 일곱 살이었다.

남미 선수가 스물 일곱 살에 유럽 무대에 진출하는 것이 큰 주목을 받을 리 없었다. 게다가 벨기에 리그는 유럽에서도 변방에 속하는 무대. 이적료마저 평범한 수준을 밑돌았다. 스스로를 밑바닥에서 시작했다고 말하는 바카에게는 스스로의 말처럼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그제서야 이뤄진 것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었다. 유럽 진출 이후 바카는 더욱 뛰어난 득점 감각을 뽐내기 시작한다. 첫 골이 터지기까지 석달이나 걸린 것은 심한 마음 고생을 동반했지만, 일단 골문이 열리자 거칠 것이 없었다. 2011/12 시즌 막판 득점포가 살아나기 시작한 바카는 유럽에서의 첫 풀타임 시즌은 2012/13 시즌, 클럽 브뤼헤의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며 유럽에서 주목받는 선수로 자리잡는다. 바카는 리그 35경기에 출전해 25골을 넣으며 벨기에 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팀을 우승으로 이끈다. 벨기에 리그 MVP 역시 바카의 차지였다.

클럽 브뤼헤 시절의 카를로스 바카 (사진=구단 공식홈페이지)

벨기에 리그를 접수한 바카에게 많은 클럽들이 이적을 제안했다. 겨우 1년 반을 뛴데다 계약 기간도 3년 더 남아 있었지만, 바카는 안주보다는 도전을 택했다. 2013년 여름, 이미 스물 여덟 살이던 바카는 클럽 브뤼헤 팬들에게 "제 나이를 감안하면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 기회입니다"라며 양해를 구한 뒤 스페인 라 리가의 세비야가 내민 손을 잡는다. 클럽 브뤼헤가 세비야로부터 받은 이적료는 700만 유로(약 102억원). 2012년 1월, 150만 유로(약 22억원)에 바카를 데려왔던 클럽 브뤼헤는 바카 덕분에 18개월만에 80억원의 이익을 챙기게 됐다. 그로부터 고작 6년 전엔 한 장에 몇 백원짜리 버스 표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바카의 한 해 연봉은 (브뤼헤 시절의 50만 유로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이제 350만 유로(약 50억원)에 달한다. 여러 식구가 좁은 집에서 칼잠을 자던 바카 가족은, 이제 정원과 수영장까지 갖춘 집에서 안락한 삶을 살고 있다.

세비야에서 바카의 활약은 눈부시다. 지난 주 레알 마드리드전에서의 2골은 그 중 일부에 불과하다. 올 시즌 리그 30경기에 출전해 14골 5도움을 기록 중인 바카는 지난 10월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도 (팀은 3-7로 대패했지만) 그들을 상대로 이미 골을 넣은 적이 있다. 올 시즌 바카는 네이마르(바르셀로나)나 다비드 비야(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가레스 베일(레알 마드리드)보다 많은 골을 넣고 있다. 그를 2013/14 시즌 스페인 라 리가 최고의 신입 공격수로 꼽는 이들이 많은 것은 그래서다. 본인도 언어와 기후, 음식 등이 달랐던 벨기에 시절과 달리 스페인에서는 많은 것이 익숙해 편하다고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다.

이제 바카는 또다른 꿈을 꾸고 있다. 그는 올해 초 FIFA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월드컵에서 뛰는 것은) 어릴 적부터 내 오랜 꿈이었다. 그리고 이제 월드컵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주전 경쟁이 치열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흥분된다. 무척 뛰고 싶고 그래서 매일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최선을 다하고 이뤄질거라 믿으면 현실이 된다." 바카는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입증해 온 선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해도 사회 극빈층이던 바카는 20대 중반부터 빛을 보기 시작해 서른을 앞둔 지금 절정을 향해 치닫는 중이다. 바카의 질주는 그래서 더 눈부시다. 사회적 약자들의 성공 스토리는 언제부턴가 진부한 클리셰로 들리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한다. 불우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기울이고 그러는 자신을 믿고 또 스스로 응원하는 것. 올 여름 우리는 그런 바카가 월드컵에서 팔카오와 함께 콜롬비아 대표팀을 이끄는 모습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 콜롬비아는 그리스, 코트디부아르, 일본과 함께 C조에 속했다. 어쩐지 이번에는 콜롬비아를 더 응원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