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6일 파주NFC에서는 매우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한국축구의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기념하는 식수 행사였는데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은 물론 조광래, 최강희 전 대표팀 감독과 홍명보 현 대표팀 감독이 나란히 나무를 심었다. 기념수 앞의 비석에는 세 감독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졌다. 축구협회가 이제 과거의 아픔과 상처도 함께 보듬고 가는 의미있는 결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4 브라질월드컵 3차예선 도중 최종전을 남기고 전격 경질당한 뒤 명예회복 차원에서 축구협회와 잔여연봉 문제로 날선 대립각을 세웠던 조광래 감독도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을 것 같았다.
이 인터뷰는 당시 행사 사진 한 장을 보면서 구상했다. 이제는 조 감독도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지난날을 객관적으로 정리하고 돌아볼 때가 됐다는 생각에 진주에 있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가대표팀 감독은 어떻게 사는가, 무엇이 어렵고 무엇이 필요한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고사했지만 거듭된 설득에 조 감독은 “그럼 진주로 내려와 밥이나 한 번 먹자”는 말로 승낙했다.
이 인터뷰는 경남FC와 FC서울의 K리그 경기가 진주에서 열렸던 지난달 25일 시내의 ‘바르셀로나 조광래 축구재단’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조 감독은 여전히 씩씩했고, 고향의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축구계에 아직도 자신의 역할이 남아있음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다.
－8회 연속 월드컵 진출 기념 식수를 하면서 어느 누구보다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다.
(대표팀을 타의로 떠난 후)그 기간 동안 상당히 나 나름대로 고통이 있었다. 한국축구가 왜 이렇게 밖에 안될까 하는 안타까움도 있었다. 지난 (식수)행사를 통해 현 집행부는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런 부분은 참 다행이다. 마음에 위로가 됐다. 앞으로 현 집행부가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적극적으로 지원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됐다.
－식수 행사 뒤 정몽규 회장, 다른 두 감독들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가.
최강희 감독에게는 고생 많이 했고 마무리 잘 해서 고맙다고 했고, 홍명보 감독에게는 후배에게 큰 짐을 지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정몽규 회장에게는 경기 일정 등 대표팀에 관련된 일은 먼저 감독과 상의를 해 결정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내 경험상에도 그게 참 중요하더라. (대표팀을 맡고 있을 때)아시안컵까지는 분위기가 참 좋았고 내가 구상하는 팀의 70% 수준까지는 올라왔는데 이후 박지성 이영표가 은퇴를 선언하면서 팀을 재건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그런 시점에 일본과 원정 평가전을 하는 것은 타이밍상으로 안 좋았다. 당시 협회에 일본전은 연기하면 안 되겠냐고 건의했는데 양국 협회가 이미 합의를 했다면서 그대로 밀고 갔다. 축구를 깊이 안다면 (그 시점의 원정 한일전은)안해야 하는 경기였다. 결국 그 경기부터 우려했던 사달이 벌어졌다(당시 한국은 8월 10일 삿포로에서 열린 일본과 경기에서 해외파를 총동원하고도 0-3으로 참패해 충격을 줬다. ‘조광래호’가 크게 흔들리는 발단이 됐다). 홍 감독은 청소년팀, 올림픽팀에서 좋은 경험을 하고 대표팀을 맡게 됐지만 대표팀은 조금 다를 것이다. 우선 주변에서 더 믿고 기다려줘야 한다. 그래야 감독이 자기의 색깔을 만들어 보여줄 수 있다. 홍 감독이 부임 초반 아직 승리를 못하고 있지만 주변에서 초조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잘 할 것이라고 믿고 더 지원해줘야 한다.
－대표팀 감독과 프로팀 감독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시간적으로 선수들과 호흡할 수 있는 시간이 적다. 프로팀에서는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세밀하고 가르쳐 주고 감독이 원하는 전술을 잘 주입하면서 경기를 운영할 수 있다. 수치로 예를 들자면 프로팀은 감독이 추구하는 축구를 선수들에게 끌어내고 원하는 전술대로 팀을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8대2 정도로 높은 것 같다. 반면 대표팀은 5대5 정도 인 것 같다.
－대표팀 감독이 어떤 장기적인 전술적 목표를 가지고 선수들을 그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주어진 선수들의 능력에 맞춘 현실적인 전술을 구사해야 하는 것인지, 어느 방향이 바람직한 것인가. ‘조광래호’는 장기적인 전술 목표를 설정하고 그 방향으로 선수들을 이끌었다는 인상이 강했는데.
그런 인상은 별로 틀리지 않은 말이다. 감독은 철학이 있어야 한다. 나는 우리 선수들도 좋은 훈련 프로그램으로 가르치면 선진적인 전술을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런 시도를 하다가)조금 삐긋하면 아예 접어버리곤 했다. 이게 한국축구의 큰 문제였다. 내 철학에 맞는 훈련을 시키고, 그런 경기를 하려고 고집을 부린 것은 사실이다. 나는 브라질월드컵까지 머리 속에 뒀다. 예전 스타일로도 예선은 통과할 수 있지만 내용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본선에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고 봤다. 4년의 준비기간을 염두에 두고 대표팀을 이끌려고 했다.
아시안컵이 끝난 뒤 (박)지성이, (이)영표와 대화를 오래 하면서 의견을 구한 적이 있다. 과연 우리 대표팀이 추구하는 훈련방식과 경기운영을 위해 (내가)선수들에게 요구하는 것 등을 그대로 유지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지성이는 대표팀의 새로운 스타일에 놀랐고, 그러면서 내가 요구하는 것을 선수들이 잘 소화하고 따라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도 이런 식으로 경기를 준비한다고 했다. 패스를 강조하거나 상대방을 강하게 포어 체크하는 것 등이 그렇다는 것이었다. 이런 나의 요구에 대해 일부 선수들이 힘들어 한 점도 있지만 해외파를 중심으로 나름 잘 따라와줬다. 영표도 우리 대표팀이 20번 넘게 끊이지 않고 패스를 해서, ‘예전에 이런 적은 없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들과 대화하면서 이렇게 밀고가도 되겠구나 하는 확신을 가졌다. 일부 부작용이 생겨도 밀고가자고 결심했다.
－그런 면에서 조광래는 이상주의자로 보이기도 한다.
이상주의자라기보다는 현대축구의 흐름에 빠르게 가까이 가고 싶어했던 것 같다.
－대표팀에서 조광래의 실험은 실패했다고 보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변명 같겠지만 일본전이나 (월드컵 예선에서 유일한 패배였던)레바논전은 우리 팀이 안 좋았던 시기였다. 내부적으로 꼬인 면이 있었다. 하지만 4년 동안 장기적으로 대표팀을 이끌고 갔다면 본선에서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지금 처음 밝히는 얘기지만 예선을 통과하면 본선를 준비하면서 대표팀에 기술 고문을 두려고 했다. 김호 감독님을 모실 생각이었다. 그래서 기술적인 자문을 구하면서 대표팀의 전술 방향을 함께 고민하고 상대 팀을 분석하면서 본선을 대비하려고 했다. 결국 (조기 경질되면서 고문 영입은)그렇게 안 됐다.
－대표선수들에게 감독이 원하는 전술을 주입시키기 위해서는 훈련 시간이 많아야 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 갭을 어떻게 메울 수 있는가.
나는 특정 경기를 앞두고 전술적 요구사항과 훈련방식을 사전에 문서와 CD로 만들었다. 선수들이 대표팀에 들어오면 각자의 방에 이런 자료를 배치했다. 미리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내가 해외파를 선호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왔는데 실제로 내가 추구하는 스타일의 훈련과 전술을 상대적으로 잘 소화한 게 해외파였던 것은 맞다. 그들은 소속클럽에서 이미 그런 식으로 훈련을 해오고 있으니 아무래도 적응이 빨랐다.
－2002 한·일월드컵 이후 해외파가 많아지면서 대표팀 내 해외파와 국내파의 갈등을 최소화한다든가 이들에게 시너지를 끌어내는 방법 등이 모든 대표팀 감독의 숙제가 됐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는가.
그 부분이 정말 어렵다고 느꼈다. 나와 함께 했던 코치들이 전임 대표팀에서도 있었기 때문에 그 때의 사례로 연구하면서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100% 완전하게 숙제를 풀지는 못한 셈이다. 그래도 터득한 방법론은 있었다. 훈련을 통해 (해외파와 국내파의 차이를)깨버리는 것이었다. 아시안컵을 앞두고 2주 정도 함께 훈련을 하다보니 느껴지는 게 있었다. 함께 훈련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갈등요소가)해소됐다. 2주 정도 훈련을 해보면 서로가 장단점, 스타일을 알게 되면서 상호간에 인정을 하게 된다. 그러면 융화가 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서로 인정을 안할 때 발생한다. 해외파든 국내파든 자기 팀에서는 최고라고 느끼는 선수들이 대표팀에 오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서로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새로운 멤버가 가세할 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훈련을 통해 서로 인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포츠서울]조광래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FC 바르셀로나 조광래 축구교실 회원들과 축구를 관람하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2013. 8. 25진주 |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해외파 선수들을 국가대표팀 감독이 직접 관리하고 챙기는데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어떤 방법이 바람직한가. 특별한 노하우가 있었는가.
감독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 협회도 기술파트를 잘 조직해 활용해야 한다. 기술위원회에 해외파만 전담하는 위원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 2명 정도면 되지 않을까. 이들이 해외파 경기도 직접 보고, 식사도 같이 하면서 대화도 나누고, 소속팀 내의 정보도 획득하고 이래야 된다. 그래서 취합된 자료를 감독에게 보고하고 협의를 해야 한다. 내가 대표팀에 있을 때 이런 방안을 건의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대표팀을 맡고 있을 때 선수 선발에 대해서는 어떤 원칙을 갖고 있었나.
국내파, 해외파 이런 것을 떠나서 내가 추구하려는 경기를 소화할 수 있는 스타일을 가장 우선시했다. 이를 위해서는 영리한 선수가 필요했다. 지능이 따라오지 못하면 내가 본선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경기를 따라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볼보다 빠른 선수는 없다. 볼보다 빠른 것은 생각밖에 없다. 생각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선수가 대표팀에 가장 필요하다고 봤다.
－대표팀 감독을 지내면서 현실적으로 가장 어려움을 느낀 부분은 무엇인가.
(한동안 고민하는 표정으로 말이 없다가)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협회와 대표팀 감독이 직접 부딪히는 것은 정말 안 좋다. 내가 나중에 후회했던 것도 김호 감독님을 (대표팀)고문으로 일찍 모셨더라면 마찰이 덜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히딩크 감독도 한국에 있을 때 코칭스태프 말고 자기를 돕는 이런 저런 사람들을 데리고 다녔다. 대표팀에 필요한 각종 업무를 협회와 중간에서 조율해줄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감독과 협회가 직접 이야기하다보면 다툴 수도 있고 서로 감정이 상할 수도 있다. 협회가 앞으로도 이런 점을 고려해 운영의 묘를 발휘했으면 한다.

[스포츠서울] 조광래 전 축구국가대표팀 감독.2013. 8. 25진주 |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K리그로 화제를 돌리자면 승강제 도입 이후 프로팀 감독이 파리목숨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감독의 값어치가 너무 떨어졌다는 비판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구단들이 인내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서 지운 것 같다. 팀을 맡겼으면 충분한 시간을 주면서 과정을 냉철하게 지켜보는 지혜와 인내심이 필요하다. 요즘 프로팀의 행정을 담당하는 프런트는 그 과정에 대한 깊이를 조금도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 프로팀 수준에서도 팀과 프런트 사이를 연결해주고 조율해줄 수 있는 고문역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K리그에서 다시 한번 ‘조광래 축구’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겠는가.
항상 준비는 하고 있다. 지금 운영하고 있는 바르셀로나 유소년 축구교실에서도 아주 흥미로운 훈련 프로그램이 많다. 강도만 높인다면 충분히 프로팀에서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훈련 프로그램들이다. 더 정리하면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웃으면서)프로팀에서 한번 써먹을 기회가 있을까 모르겠다. 여건이 안 좋은 팀이라고 해도 훈련을 통해 좋은 팀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 경남을 맡았을 때도 그런 것을 보여주지 않았나.
－팬들에게 요즘 근황을 소개해준다면.
동심으로 돌아와 잘 살고 있다. 내가 운영하는 축구교실에 일주일에 네 번 정도 나가 직접 아이들을 가르친다. 선수반이 아니라 아직 취미반만 운영하고 있는데 1등하는 학생이나 전교회장도 많이 나온다. 바르셀로나의 유소년 프로그램을 보면 기술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기 전체를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인성교육도 잘 돼 있다. 이런 좋은 점을 우리 쪽에도 이식하려고 한다. 나중에 지도자를 은퇴하게 되면 프로팀에서 유소년을 장기적으로 육성하는 행정업무 같은 것도 해보고 싶다. 유소년을 길러내는 것이야말로 진짜로 큰 행정이다. 게시물 내용 보기 링크